🎅메리 크리스마스🎄 먼저 본 책의 일곱 번째 글을 발행합니다. 어제 저는 플라톤의 편지 가운데 일곱 번째인 「제7서신」을 박종현 역譯과 천병희 역으로 읽었습니다. 지난주 책꽂이 한 칸을 비우고 새로 주문해 채워넣은 것은 박종현, 천병희 번역의 플라톤 전집입니다. 2026년의 공부는 플라톤 서신에서 시작해 『티마이오스』까지 나가보려 하는데요, 그동안 단련해온 읽기의 근성이 이 일을 가능케 해주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책으로 내년을 준비하고 계시나요? 올해 마지막 레터에서는 2026년 글항아리를 미리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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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테라스로 나서면 저무는 올해가 정면으로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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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첫 달이지만 세 권의 책이 새해를 비장하게 맞는 동료들처럼 나란히 출간됩니다. 바로 『천국의 가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그리고 『말하라, 침묵이여: 제발트 평전』입니다.
컨딜 역사상 수상작인 스티븐 플랫의 『천국의 가을』은 고대 그리스 서사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역사서입니다. 사료로부터 엮어낸 이야기의 감각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뜻밖에도 첫 부분에 카를 마르크스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 통신원으로 등장하며 이 내전에 대한 소식과 자신의 기대를 들려줍니다. 1848년 유럽 혁명의 여파가 아직 수그러들지 않던 1853년, 마르크스는 중국의 이 반란 역시 혁명의 불꽃이 되지 않을까 짐작한 것이죠. 역사서를 읽을 때 우리는 당대 사람처럼 현장감을 그대로 느끼길 원하면서 동시에 전지적 시점에서 전체를 파악하고 싶어합니다. 양극단의 시간을 동시에 소유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지요. 이 책이 그런 바람을 충족시켜줍니다. 예컨대 1853년의 어느 날, 태평천국군이 말을 타고 달릴 때 바람의 방향은 어떠했고, 일몰 시각은 언제였는지 세세히 밝히며 전장 한가운데에 독자를 데려다놓고는, 동시에 세계사적 시각에서 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영국의 오만과 프랑스의 실수를 치밀하게 분석합니다. 게다가 홍인간과 증국번이라는 두 인물의 이중二重 전기로 구성됐다는 것 역시 이 책의 독창적인 부분입니다. 집과 마찬가지로 책의 구조 또한 견고한 힘을 발휘하는데, 『천국의 가을』은 이중 전기와 사건 전개가 얽히는 탄탄한 구조 속에서 문학적 필치를 잃지 않고 중국의 풍경과 인물의 행동을 한데 얽어 힘 있게 뻗어나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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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가을: 중국과 서양, 그리고 태평천국 전쟁의 역사』
스티븐 플랫 지음, 임태홍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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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글항아리에서 내년에 출간할 목록의 핵심 포인트를 알고 싶은 분도 계신가요? 그렇다면 ‘가해자 연구’가 큰 줄기 중 하나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이토 아키요시와 니노미야 사오리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클라우스 테벨라이트의 『남성 판타지』, 이동기의 『폭력 가해자와 악의 비범성』 모두 가해자들을 연구한 것입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끈질기게 가해자들과 편지를 통해 대화하는 사이토의 책을 편집하면서 저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조차 ‘이 대화는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분명히 적혀 있고 둘은 봉투를 뜯어 읽는데도, 피해자의 경험과 마음은 피상적으로만 독해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수많은 죄악은 ‘공감 능력 결여’보다 ‘피상적 이해’에서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분들이 힘들어할 부분은 가해자도 여느 인간처럼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여서 결국 망각을 택한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피해자는 망각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그래서 가해자가 기억을 지운 채 평온해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책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육성이 그대로 담겨 있고, 그런 면에서 기존에 피해자들이 쓴 에세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털어놓자면, 고교 시절 학교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이 책을 계약할 당시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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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이 대화는 가능할까?』
사이토 아키요시 · 니노미야 사오리 지음, 조지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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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판타지』는 원서가 1280쪽입니다. 가해자 연구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범죄자들이 대체로 엄청난 양의 기록을 남기는 데 있습니다. 한 예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아이히만이 쓴 원고를 이어 붙이면 240킬로미터에 달하지요. 저자 테벨라이트의 아버지는 나치에 동조한 철도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재단사의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독일 우익 민병대 조직인 자유군단의 젊은 남성 가해자들을 연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부모 세대의 과오는 이처럼 자식 세대에서 씻겨나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책은 문화비평, 영화 이론, 페미니즘, 남성성 연구, 정신분석학, 젠더 이론 등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참고문헌으로, 중요도가 매우 높습니다.
독일 현대사 연구자인 이동기 교수는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 때 독일에 가서 가해자 연구에 몰두해왔습니다. 그의 연구 관점은 ‘행위자의 자율성’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가령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환경적 조건보다 행위자의 능동성이 언제나 더 크고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는 재고찰되어야 할 여지가 많습니다. 즉 아이히만은 나치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한 조직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적극적인 가해자였다는 게 그의 관점입니다.
올해 아티초크 출판사에서 제발트에 관한 글 모음집인 『기억의 유령』 개정판을 냈는데요, 이 책은 참 좋습니다. 제발트와의 인터뷰뿐 아니라 길고 짧은 비평들이 어쩌면 그리도 아름답던지요. 제발트는 ‘침묵’의 인간이었습니다. 그의 행적과 생각들은 불분명한 것이 꽤 있고, 가족인 아내와 딸조차 외부 사람들과의 대화를 거부해왔죠. 하지만 벽과 장막을 걷어내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이들이 바로 작가들입니다. 캐럴 앤지어는 최초의 제발트 평전인 『말하라, 침묵이여』를 썼습니다. 그는 제발트의 친구, 동료, 가족 일부와 인터뷰를 진행해 공백의 틈들을 메우고 삶과 관련된 사건들을 면밀히 추적해나갔습니다. 침묵의 틈에서 건져올린 소리 없는 경험들을 8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함께 목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레터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하는 책이 너무나 많습니다. 미국 독립혁명 250주년을 맞아 준비하고 있는 책이 두 권 있고요,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담집도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40년간 할아버지-아버지-아들 세대가 이어서 쓴 회고록을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내 쓴 『근대 이탈리아의 어느 귀족 가문 이야기』는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 만큼 흡인력 있는 미시사의 표본입니다. 저자 로베르토 비조키는 미시사 연구의 본거지인 피사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미시사 연구의 거장입니다. 『나쁜 책』의 저자 김유태가 펴낼 『밤과 책』이 많은 독자에게 선물처럼 안겨질 것입니다. 사유형 문장의 전범이라 할 그의 글을 기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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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우리 책들로 우람한 눈사람도 만들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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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닳고 거의 사멸해가는 오늘 2026년의 계획을 나눴지만, 사실 다들 내면에서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는 회고의 힘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을 겁니다. 흔히 모든 일에는 태초와 끝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직선적 발전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 끝에 이르렀을 때 그 태초를 더 선명히 인식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는 듯합니다. 내년 한 해 수많은 시간의 틈들이 여러 출판사의 양서들로 채워지길 바라봅니다. 그 흐름 속에서 언제나 운항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며, 그에 따라 맞이하는 운명과 우연도 달라질 테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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