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본 책의 네 번째 글을 발행합니다. 글항아리에서는 지난주 앤서니 리드의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를 펴냈습니다. ‘전체사 쓰기’를 시도한 역작으로 이미 학자들 입에 오르내린 세월이 수십 년이지만, 난해한 번역 때문에 이제야 선보입니다. 사실 글항아리는 이 책에 관한 한 후발 주자입니다. 이 분야 전문가로 알려진 S대의 S교수님이 리드의 이 책을 10년간 붙잡고 있다가 번역을 완성하지 못한 채 출간을 포기했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다른 출판사로 판권은 넘어갔고, 거기서도 완결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 번째로 판권을 계약했고, 끈기를 가진 덕분에 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으뜸가는 의의는 다시 한번 말하건대, 전체를 꿰뚫으려는 저자의 시도에 있습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10월에 선보일 책 중 걸작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정치학자 조홍식의 『정치의 발명: 아테네 폴리스에서 EU까지 유럽의 정치 문법』입니다. 국내 학자들은 책보다 논문을 주로 쓰고, 자신의 연구 범위나 주제를 좀처럼 넘어서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서양 비교가 잘 이뤄지지 않을 뿐 아니라 고대와 중세, 현대를 넘나드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구획 지어진 밭 안에서 제 몫을 열심히 경작할 뿐 연결 짓는 작업은 언제나 개별 독자들의 몫으로 넘겨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조홍식 교수는 비교 개념의 정확한 근거와 변별력을 가지고 시야를 종횡으로 확장합니다. 정치철학자로서 개념들을 엄밀하게 매만지고, 정치의 현실성과 역사의 구체성을 엮어 2500년의 정치사를 다뤄냅니다.
이 책은 ‘유럽’에 관한 것도, ‘정치’에 관한 것만도 아닙니다. 유럽이 곧 한국이자 세계라는 관점에서 보편사를, 정치가 곧 철학이자 생활세계라는 점에서 전체 사상을 다루는 시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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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발명: 아테네 폴리스에서 EU까지 유럽의 정치 문법』 조홍식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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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를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수많은 철학자가 있지만 ‘존재’ 하나로 꿰뚫으려 했던 하이데거 같은 인물이 오늘날까지 가장 우뚝 서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미시사를 발명하고, 소외됐던 감정을 발굴하고, 하류의 주체를 발견하고, 그림자로 남았던 피해자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등 역사의 지류를 중앙의 무대로 올린 것이 20세기의 저술과 출판의 경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런 흐름이 오래 지속되자 우리에게는 전체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 하나둘 싹틉니다. 부분은 잘 알겠는데 전체 모습은 어떻게 되지 하며 알려는 욕망. 부분의 앎이 전체 진리와 합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 인간에게는 언제나 시야를 확보하고 체계를 세우려는 욕구가 본능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발명』은 고대-중세-현대를 꿰뚫고, 서양과 동양의 문명을 오가며, 기독교와 이교도 사이를 연결 짓는 시도를 합니다. 어떤 학자나 작가들은 과감하게 큰 지도를 그리며 나아갑니다. 11월에 나올 책 중 하나를 살짝 언급하자면 중국의 소설가 츠쯔젠 역시 그런 작가입니다. 그녀는 만주국 전체의 역사를 1730쪽에 걸쳐 써냅니다. 푸이 황제부터 동네 절름발이까지, 중국군에서 한국의 위안부 여성까지, 대동아전쟁을 치르러 떠나는 일본군부터 그들을 배웅하는 젊은 여성들까지, 그녀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는 나날과 주변부, 구석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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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책을 한 번만 읽지 않고 재독, 삼독을 합니다. 제 경우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은 책은 모리스 블랑쇼의 『우정』과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입니다. 편집하면서 가장 많이 읽은 원고는 『발터 벤야민 평전』이고요. 벤야민 평전은 열 번 읽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여러 번 읽을 때 나타나는 효과 중 하나는 뒤의 독서가 앞의 독서를 재배치, 재의미화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뒤의 독서가 먼젓번 독서를 더 풍부하게 하기도 하지만, 실은 앞의 책들을 별것 아닌 것으로 위치 짓게 만드는 경험도 종종 합니다. 가령 최근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읽으면서 작가 C를 떠올렸습니다. 저는 뛰어난 묘사력 때문에 c를 독보적인 작가로 여기며 좋아했는데요, 알고 보니 그 기법은 이미 플로베르에게서 오래전 나타난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C에 대한 옛 감정을 도로 거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읽기는 깊이 읽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다보면 전체 지평 안에 그 작품을 놓게 되는 또 다른 효과도 안겨줍니다. 이런 가운데 또다시 현대 문학사 전체, 20세기 문체의 계보, 진리를 탐구한 2500년의 철학을 향한 열망에 불을 지피게 되는 것 같아요.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그런 점에서 글항아리에서 곧 선보일 『정치의 탄생』, 일독을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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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발명: 아테네 폴리스에서 EU까지 유럽의 정치 문법』
조홍식 지음 (10월 출간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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