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간 『자백의 대가』를 『자카르타가 온다』와 함께 읽었습니다. 장독대 프로젝트 ‘이제 본 책’
의심 많은 편집자 글쪽이와 욕망 많은 편집자 욕망의항아리가
글항아리의 구간을 살펴봅니다.
『자백의 대가』(2011)
크메르루주 살인고문관의 정신세계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 전혜영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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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항아리 돌아온 해적판 레터. 김치찌개에 흑미밥을 먹으며, 든든한 대화를 시작해볼까? 이번에 읽은 『자백의 대가』(이하, 『자백』)가 2011년에 출간된 책인 거 알았어? 벌써 15년 전이래. 이전에 글쪽이가 지나가는 말로 ‘구간이 명간이다’라고 했잖아. 엄청난 펀치라인이라 생각해서 그 뒤로 구간을 읽을 때마다 떠올렸거든. 근데 오늘의 책 『자백』을 읽으면서는 시간차를 느껴버렸달까? 여판사, 여변호사…… 이럴 때마다 헉, 했어. (허겁지겁 먹으며) 맛있다, 그치.
글쪽이글쪽이 맛집이다, 여기. 게다가 『자백』이랑 같이 읽은 빈센트 베빈스의 『자카르타가 온다』(이하, 『자카르타』, 두번째테제)가 거의 10년 뒤인 2020년에 출간된 책이라 그런지 더더욱. 두 책 모두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취재한 책인데, 『자카르타』는 1965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일어난 학살이 냉전시기 제3세계를 가로지르며 어떻게 반복, 변주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자백』은 같은 시기에 캄보디아에서 자행된 학살의 핵심 부역자 ‘두크’라는 인물의 전범재판을 집중해 다룬 책이야. 최근에 이런 말을 들었어. 글항아리에서 범죄를 다룬 책들이 자주 나오는 것 같다고.
욕망의항아리 하긴, 지난 달에 출간한 『한 여성 살인범의 초상』, 그보다 좀 전에 출간된 『살인자의 정신』 『헬터 스켈터』 그리고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범죄 사건을 분석하거나 범죄자의 심리를 탐구하는 책들을 소개해왔는데, 책마다 저자의 접근법이 다 다르다는 게 재미난 지점 같아. 편집장님께 들었는데 역자 김현우 선생님이 글항아리에 범죄 관련 외서들을 제안하시면서 범죄야말로 당대 사회를 알게 한다고 말씀하셨대. 그 말을 듣고부터 나도 범죄에 관한 책을 읽을 때 당대 사회와 지금 내가 사는 사회를 같이 떠올리게 되더라고. 그리고 마침 최근에 읽은 『한 여성 살인범의 초상』에서 저자 후무칭이 김현우 선생님과 똑같이 말하지 뭐야. 범죄야말로 사회 아래에 깔린 조건들을 보여준다! 범죄 사건을 둘러싼 온갖 말들에서 사회상을 읽을 수 있을뿐더러 그 사회에 통용 가능한 게 뭔지 알게 한다고. 범죄자가 진술을 하든, 기자가 그걸 취재해서 책을 쓰든, 사람은 어디까지나 남이 알아들을 수 있게,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선 안에서 말하잖아. 그 모든 말해진 것들 혹은 감춰진 말들이 ‘승인의 체제’를 확인해주는 것 같아.
『자백』 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지금에 읽는 내가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떤 지점에 불편해하는지 관찰하면서 당대와 이곳을 비교해볼 수 있을 거 같아.
글쪽이글쪽이 멋진 독법이다. 『자백』 속 재판정에서의 진술들, 저자 티에리의 문장들을 면밀히 생각해봐야겠는 걸. 무엇이 말해졌는가만큼이나 무엇이 말해지지 않았는가까지. 그리고 『자백』을 받아들이는 우리와 우리 사회까지. 『자백』은 중쇄를 거듭하다 2판을 찍었더라? 이건 한국 사회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까. 욕항이는 이 책을 어떻게 읽었어?
욕망의항아리 『자백』은 캄보디아에서 1970년대에 자국민을 대상으로 벌어진 국가폭력, 정치 이념에 따른 대량 학살을 다룬 책이잖아. 특히 사람들의 자백을 받아내고 처형을 감독했던 두크라는 인물의 전범재판 현장을 저널리스트 티에리 쿠르벨리에가 취재한 책이란 말이지. 그래서 저자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에 해석을 붙이면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데…… 중간중간 티에리의 관점이 끼어들 때마다 그런 개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헷갈렸어. 가령 두크가 재판장에 들어온 증인(생존자)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두크의 시선을 차마 받아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그럼에도 목덜미에 칼이 들어온 듯 한기를 느껴야만 했다”(81)라고 적을 때, 이건 저자가 구성해낸 장면이잖아. 또는 저자가 킬링필드라거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들을 관광지화하는 인물을 만나거나, 혹은 그곳을 관광 오락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상당히 냉소적으로 되는데, 이렇게 티에리가 제3자이자 관찰자로서 선을 그을 때마다 불편하더라고. 이 불편함이 대체 뭘까 고민하는 게 이 책을 읽는 내 태도였다고 해도 될 만큼. 이 책은 비극적인 사건의 전후 배경이나 역사적∙물적 토대가 설명되지 않은 채 두크라는 인물을 미스터리한 인물처럼 묘사하는데, 나 역시 단지 제3자로서 이 사건을 그저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몸이 옴짝거리더라고.
글쪽이글쪽이 두크는 재판 당시 크메르루주 고위 간부 가운데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전범재판 전문 기자 티에리도 그동안 참석한 재판에서 두크처럼 적극적으로 죄를 인정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어. 그래서일까, 책에는 두크라는 ‘흥미로운’ 인물을 이해해보려는 강한 열기가 느껴졌고, 나도 몰입해서 따라 읽게 되더라.
그런데 정작 두크가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역사적 조건보다는 심리적 분석에 더 치중되어 있어 아쉬웠어. 두크가 얼마나, 어떻게 악인인지 심리적으로 탐구하다 보면 결국 악의 평범성이라는 다소 보편적인 문제로 수렴하게 되는데,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이야기지만 이미 아이히만을 둘러싼 논의에서 집중해서 얘기되었던 주제였던 만큼 나는 두크를 만든 캄보디아의 역사적 조건을 알게 되길 기대하며 읽기 시작해서 그랬던 거 같아. 그리고 『자백』과 『자카르타』 모두 학살을 겪은 인물들을 취재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어쩌면 사소하고 개인적인 차원까지 파고듦으로써 역사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학술적인 분석보다는 주관적인 묘사를 활용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다른 책이 된 것 같아서 그런 차이가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해지더라.
욕망의항아리 『자카르타』가 아카이브 조사랑 무엇보다 당사자 인터뷰를 철저히 수행해서 쓴 책이라면 『자백』은 인터뷰보다는 자료 조사와 현장 취재를 우선으로 한 책인 것 같은데, 그게 큰 차이를 만드는 것 같아. 『자카르타』에서 자국민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설명하는 대목도 있잖아.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여전히 유가족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사건을 다룰 때, 현장 조사에서 ‘내’가 느낀 것을 진술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불충분한 일인지 생각하게 됐어. 물론 『자백』과 『자카르타』는 성격이 매우 다른 책이고, 『자백』의 부제 “크메르루주 살인 고문관의 정신세계”에서부터 이 책이 집중 관찰하려는 건 눈앞에 앉아 있는 불가해한 인간 두크라는 게 분명하지만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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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렬 독서 합시다 ^_^
글쪽이글쪽이 두크가 속한 크메르루주 집단이 사람들을 처형했던 건, 혹여나 그들이 CIA의 지령을 받고 반공주의적 움직임을 보일까봐(혹은 보였기에)였잖아. 『자백』을 읽다 보면 아무리 냉전 시기래도 오만 사람을 어떻게든 CIA랑 엮어서 죽이니까, 그 의심이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는데 『자카르타』를 같이 보면 그런 의심을 품게 된 데 역사적 배경이 있긴 했구나 싶었어.
욕망의항아리 나도 그랬어. CIA? 편집증적인 의심이라 생각했는데 결코 그렇지만은 않더라. 희생자 유가족들이 재판장을 찾고, 피해 당사자가 증언을 하기로 결심했던 주된 이유가 실은, 대체 ‘왜’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는 거였잖아. 내가 사랑하는 남편, 아내, 자식이 왜 죽임당해야 했는지 설명해달라는…… 심리학자들이 분석해주는 두크의 정신세계며 심연만으로는 ‘왜’에 충실히 답할 순 없다고 생각해. 저자는 ‘우리가 두크를 괴물로만 보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의미심장하게 묻기도 하지만 난 재판장에 있던 그 누구도 두크를 ‘괴물’이라 생각하지 않을 거 같았어. 오히려 너무나 사람이기에, 나랑 다를 거 없는 사람이 대체 ‘왜’. 『자백』도 이 지점에서 다소 체념하지 않았나 싶고. 그래서 『자카르타』를 읽으면서 두크가 어떤 구조 안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당대 사회가 어떤 선택을(심지어 그것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일지라도) 더 매력적인 것으로 포장했을지…… 그런 걸 읽을 수 있어서 답답함이 조금 해소됐어. 1960~1980년대를 ‘좌우’했던 이념 투쟁, 대국 미국과 소련에서 빚어낸 갈등이 제3세계에도 노골적으로 영향을 끼쳤잖아. 제3세계 나라들은 미국에 척지지 않고 원조를 받으려면 반공주의를 효과적으로 해내고 있다고 증명해보여야 했기 때문에 공산당원들을 말살하는 식으로 미국의 편에 섰으니까. 이런 배경들이 두크를 아주 미미한 구조 속 개인으로 위치 지어주기더라고.
글쪽이글쪽이 『자백』 말미에서 본인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던 두크가 판결 직전에 무죄를 주장하잖아. 형을 이미 10년 살았고, 자기 윗선 사람들은 재판도 받지 않는데 자기만 책임을 지는 게 부당하다는 주장이었지. 처음엔 그 말이 ‘쟤가 더 잘못했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같이 단순하고 유치한 논리로만 들렸거든. 그런데 캄보디아 학살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두크 위에 상부 인사들, 그 위에 미국을 위시한 서양의 패권 세력들이 있는데, 이를 충분히 얘기하지 않고 두크의 ‘악’을 심판하는 게 부당하긴 했구나 싶었어.
욕망의항아리 그치. 미국과 당시 그에 협조하던 서구 국가, 그리고 식민지배국들의 영향. 근데 왜 저자는 그 얘기를 안 했을까? 티에리 자신이 캄보디아의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 사람이라는 조건이 어떻게 작용했을지 궁금했어. 그 물적 조건을 성찰하지 않는 게 이 책의 치명적인 한계일까. 물론 저자는 이렇게도 말해. “국제 재판은 여러 불안한 면을 안고 있다. 애초에 탈식민지 시대의 모순과 여러 환상, 악습들에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서양 국가나 유엔 사무국이 국제 재판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면서 약자, 교육을 덜 받은 자, 가난한 자, 추방된 자가 강자, 부자, 교육받은 자, 지배자에게 심판을 받는 장소가 되어버렸다.”(463) 서구 지식인으로서 재판장에 와 있는 자기의 한계를 저자도 모르진 않지만, 그걸 계기로 적극적인 자아 성찰을 하지도 않지.
글쪽이글쪽이 『자카르타』에 따르면, “의례적 자살의 전통적 형태”를 뜻하는 말레이어·인도네시아어의 단어 ‘아목amok’이 서양에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그 뜻이 바뀌어 쓰이는데, 이 바탕에는 “아시아인은 원시적, 후진적, 폭력적이라는 고정관념을 이용해 폭력의 책임을 갑자기 벌어진 비이성적인 폭발 같은 것으로 몰아가”(257~258)는 서구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대. 『자백』에서 캄보디아 사람들을 재판장에서 호랑이 연고를 바르며 특유의 향을 폴폴 풍기는, 이국적이고 순박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그릴 때마다 혹시 학살을 ‘아목’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더라고.
두 책에 나오듯 캄보디아 학살이 세계에 알려지고 전범재판이 열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대. 이제 캄보디아 학살은 자국민의 4분의 1을 죽였다는 충격적인 규모와 반공주의로 인해 과도하게 단순화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지만(유튜브에 검색해봐도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내건 영상이 많더라). 보통 잘 조명되지 않는 동남아시아 역사를 다룬다는 것 자체는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인 듯해. 그것이 소재주의에 그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동남아시아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거 같아.
한편 『자카르타』를 읽을 때는, 아무리 미국과 인도네시아 군부에서 반공 작전을 추진했다지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죽고, 민간인들마저 학살에 참여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더라고. 죽음이 거듭되니까 통탄스럽고 아연해지고. 이 만연한 학살의 주동자들을 도대체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아득해질 때면 『자백』으로 돌아와서 그 불가능해보이는 일을 어떻게든 해보려는 인간들의 고투를 봤어. 아아, 이래서 병렬 독서* 해야 한다…….
*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병행해서 읽는 독서법.
욕망의항아리 티에리가 책에서 반복해서 전하는 메시지가 ‘어떤 진실도 자기만의 진실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자백 또한 만들어진 조건 안에서 진술된 것일 뿐 명백한 사실은 증언될 수 없다는 거잖아. “이 세상에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법정 안은 진실이 빛을 발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내면의 감정이 노출되는 곳, 삶의 밀도가 극에 달하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법정이 결핍의 공간, 실망이 가득한 지대가 되기도 한다.”(83) 이처럼 티에리가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두크가 피해자들에게 저지른 일의 가학성이 인식 가능해지고, 동시에 두크의 자백에도 우리가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거 같아. 이 책을 한국에서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으로 냈을 때 '대가'의 중의적 의미를 모두 읽을 수 있다는 게 절묘하지? 내가 보기엔 이 책은 한국 제목이 베스트야. 그는 이른바 살인고문관으로서 자백을 끌어내는 대가大家였지만, 동시에 그가 이끌어냈던 수많은 자백의 대가代價를 치르고 있을뿐더러, 그 역시 자백함으로써 그 대가 역시 치를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거든.
글쪽이글쪽이 절묘하다! 티에리가 거리를 두고 기록했던, 진실에 닿고자 분투하던 여러 군상이 기억에 남아. 재판장에 선 가해자와 희생자, 희생자 가족, 변호사 및 관계자들의 모습이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알았어. 어떤 희생자는 있었던 일을 명료하게 진술하지만, 어떤 희생자는 진술을 번복해. 어떤 이는 두크에게서 평범한 인간이자 학살자라는 두 면모를 보고 혼란에 빠지고, 어떤 이는 종교의 힘을 빌려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지.
부하에게 “제발 부탁이니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게! 그냥 진실을 말하게! (……)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할 준비가 되었어. 그리고 그에 준하는 대가를 받을 걸세”(399~400)라고 외치던 두크가 재판 판결 직전에는 무죄를 주장하고.
욕망의항아리 두크는 자기 자신도 일종의 피해자라고 생각했을까?
글쪽이글쪽이 그랬을 것 같아.
욕망의항아리 그렇게 직접 말하진 않잖아?
글쪽이글쪽이 그건 그래. 잘못은 인정하는데 형을 더 살긴 싫다고 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거기까지가 사회에서 통용된다고 여겨지는 말이었을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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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속 개인
글쪽이글쪽이 “똑똑하고 교양 있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열심히 노력하며 사소한 것까지 꼼꼼하게 신경 쓰는 사람, 일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 모든 방면에 프로 정신을 보이며 상부를 만족시키는 성과를 보여주고자 애쓰는 사람, 자신이 하는 일에 대체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27) 증거자료로 채택된 두크에 대한 진술인데, 두크의 일에 대한 자세가 학살에도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참 아찔하더라. 자칫하면 나도 이렇게 될 수 있겠다 생각했어. 내가 ‘두크 같은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일꾼’이라고 자부할 수도 없지만, 누가 뭐 하라고 하면 별 생각 없이 하거든. 할 수 있는 게 있네, 기뻐하면서. 잘못된 구조에 들어가면 무심코 잘못을 저지를까 봐 아찔해. 이미 저질러왔고 저지르고 있을 거고.
욕망의항아리 할 수 있는 게 있어서 기뻐하면서? 글쪽은 엄청난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들이 나쁘다. 음, 난 다들 비슷한 마음을 품을 거 같아. 사회 속 인간, 구조 속 인간의 취약함이란! 두크가 엄청나게 언어적인 인물이라는 것도 새삼스러워 보이더라고. 기록을 꼼꼼히 남기고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잘 짜인 명문을 써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아이히만도 떠오르고.
글쪽이글쪽이 두크가 말년에 기독교에 빠진 것도 흥미롭더라. 『자카르타』에서 공산주의자 학살 생존자 중에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흔했다고 하고.
욕망의항아리 『자카르타』에서는 ‘공산주의자는 무신론자이고, 무신론자이면 죄인이다’라는 논리로 국가폭력을 정당화했던 게 기억나네. 그래서 종교를 믿은 사람도 있고, 마음의 안식을 찾아서 종교에 입문하고 실제로 가해자를 용서하기도 한 사람도 있었지.
글쪽이글쪽이 두크는 셀프 용서한 느낌인데……
욕망의항아리 아무래도 스스로 구원받지?
글쪽이글쪽이 재판장에서도 검사가 두크의 개종이 용서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겠냐고 묻잖아. 티에리가 짚어주듯, 두크에게는 무언가를 열렬히 믿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었고 그 대상이 공산당에서 기독교로 옮겨간 것일 수도 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궁금해졌어. 전쟁과 학살처럼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종교는 어떤 질서와 의미를 제공했을지.
욕망의항아리 오, 그 질문만으로도 두꺼운 책이 써질 것 같아.
결국 두크를 둘러싼 가장 주요한 쟁점은 두크가 ‘크메르루주의 공산주의 이념하에 상부들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수밖에 없던 불가항력에 휘말린 인물인가, 혹은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데 적극성을 발휘하며 상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자기 생존만을 우선한 사람인가’잖아. 나는 『자카르타』에서 수많은 공산주의 지식인과 반공주의 말살 정책에서도 살아남은 인물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념하에 있는 사람 역시 ‘선택’을 하며, 그 선택들로 다시 세계를 조직해낸다는 걸 봤던 거 같아. 『자백』 최종 변론에서 희생자 측 변호사의 의견을 들어봐도, “두크가 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당의 비정상적인 강박관념을 키워 사람들을 끊임없이 체포하게 함으로써 악순환을 심화시켰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구조 속에 살고 있지만 그럼으로써 구조를 작동시키고 바꾸는 것 또한 우리라는 게 이렇게나 분명하잖아. (라투르!) 두 책을 같이 읽으니까 인간의 희망과 비극의 낙차가 느껴지네.
한편으론 제3세계에서 일어난 이념 갈등과 그 비극을 제1세계의 저널리스트가 어떻게 취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관점을 벼를 수 있었던 것 같아. 어쩌면 세상에 두 유형의 인물이 있는 걸까? 폭력이 일어나면 외부 요인이 궁금한 사람과 폭력을 저지른 사람의 정신, 심리, 삶의 이력이 더 궁금한 사람. 우리는 전자 같아.
글쪽이글쪽이 응, 그런 편인 것 같아. 개인적으로 잘 안 맞는 책을 만났나? 근데 확실히 두 권의 책이 결이 달라. 애초에 다른 목표를 잡고, 다른 시도를 하고 있지. 그래서 아쉬움이 더 남는 걸 테야.
욕망의항아리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면 생략되고 포기하게 되는 조건들이 있는데, 우리는 도리어 그 부분이 궁금한가 봐. 우리가 아시아인이고 한국에서 벌어졌던 폭력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어서일까. 티에리가 하려고 한 것,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재구현해내려고 했던 드라마틱한 시도와 인간 존재를 면밀히 들여다보려던 관찰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우리 두 사람의 숙제일지도 몰라.
글쪽이글쪽이 더불어 이 책이 그동안 한국에서 어떻게 읽혔을까도 곰곰히 생각해보고 싶다. 아까 우리가 말했듯, 성실하게 일하다 어느새 두크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아찔함은 우리 주변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감각이잖아. 특히 근면성실과 순응을 강조하는 한국의 노동 윤리와 맞닿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앞장서서 세계반공연맹을 세웠던 국가답게 반공주의가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사회라서 이 소재가 친숙하게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고. 기사에서 봤는데, 캄보디아 학살을 다룬 「킬링필드」가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흥행했던 외국영화래.
욕망의항아리 1980년대 군부 독재 정권에 맞선 시민들에게 이 영화의 의미가 남달랐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공산주의가 얼마나 악마화돼 있는지 일상생활에서도 느껴지지 않아? 얼마 전에 스타벅스에서 민주화운동을 모욕적으로 조롱한 프로모션이 문제였잖아. 그래서 불매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그때 극우 세력에서 뜬금없이 ‘멸공’을 외치면서 스타벅스를 옹호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요즘 우리 세대가 공산주의가 뭔지 알기나 할까. 근데 멸공이라니! 멸공이라는 슬로건이 이 시대에도 반복되다니! 어릴 때 학교에서 이념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그때도 빨갱이라거나 공산당이라거나 하는 단어들이 부정적으로 사용됐던 게 기억 나. 우리 세대만 해도 공산당과 꼬리 달린 악마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
글쪽이글쪽이 그러게. 스타벅스 같은 사태를 보면 이제 국가에 의해 반공주의를 교육받았던 세대만의 문제도 아닌 거 같아. ‘반공’이 ‘멸공’으로 변주되어 돌아오는 지금, 냉전시기 국가폭력, 미국발 반공주의의 잔재처럼 보이면서도, SNS와 같은 기술과 접합해 뚜렷한 원천 없이 일상 이곳저곳에 혼재하는 폭력을 사람들이 학습, 재생산하고 있는 상황은 아닐까 두려워. 그렇다면 티에리가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폭력에 가담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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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맨』 11권에서 덴지와 코베니의 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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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쪽이글쪽이 『체인소맨』의 한 장면도 떠올랐어. 두크가 “전 그때 상관들의 눈에 양치기 개나 다름없었어요”(97)라고 말했잖아. 그때 『체인소맨』에서 동시대 젊은이들의 안티 히어로인 덴지의 말이 겹쳐지더라고. 두크는 덴지처럼 사랑받는 안티히어로가 아니고 될 수도 없겠지만 말야. 두크의 시대가 공산주의 같은 거대한 이념에 자신을 바치는 시대였다면, 오늘날은 덴지같이 큰 대의가 없어도 폭력적 구조에서 적응하고 살아남으며 체념하고 자조하는 감각이 익숙해진 시대처럼 보여. 여전히 구조 속 개인은 악 앞에서 취약하고, 이 질문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 같다…… 냉전은 끝났고 옛날같이 노골적인 국가폭력이 드물어졌는데도, 여전히 폭력의 구조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는구나 싶었어.
욕망의항아리 나 역시 그런 마음을 체념, 자조, 무기력으로 표현하고 싶을 때도 많고, 실제로 그렇게 느낄 때도 많은데, 오늘 우리 대화에선 슬픔이라고 말해보고 싶네. 우리는 슬픔에 빠져 있어. 하지만 슬픔이 또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곤 하는지도 이야기해보고 싶어.
음, 『자카르타』 책 끝에서 일종의 헌사처럼 인터뷰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그들의 근황을 소개하는 지면이 있잖아. 그때 프랑스에 사는 누리 하나피 할머니가 킥보드를 타고 쌩쌩 달려오더니 킥보드를 자기 ‘할리 데이비슨’이라고 말한 장면 기억 나지? 살아남은 사람의 생기가 이토록 사랑스럽고, 그들의 투쟁의 기억을 이토록 성실히 받아쓰고 실어 나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들을 떠올리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슬프면서도 활기찬 세계 아닐까.
오랜만에 돌아온 해적판 레터 덕에 실컷 떠들었다. 어느새 김치찌개는 차갑게 식었지만, 열에 들떠서 대화했더니 몸이 뜨끈하고 단단해진 기분이야. 다음 대화가 또 기다려진다.
글쪽이글쪽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잔잔하게 밀려왔던 감정을 욕항이 덕분에 다시금 느껴…… 반복되는 역사적 비극에 슬펐는데, 비극을 살아낸 인간의 생기가 아름다워 눈물 날 거 같네. 좋은 책을 만나니 한없이 기쁘고, 같이 읽으니 배로 기쁘다. 한 구독자께서 우리의 대화를 읽고 책모임을 하고 싶어졌다고 말씀해주셨을 때도 기뻤지. 같이 읽으실 분 언제나 환영입니다. 곧 있을 서울국제도서전에도 오시는 분이 계실까. 오신다면 우리 인사해요. 다음 책으론 무엇을 읽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항아리를 뒤져봐야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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