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본 책의 열한 번째 이야기를 보냅니다. 요즘 나와 동료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종종 같은 주제로 돌아온다. 등 뒤에 고무줄이 달린 것처럼 튕겨나갔다가 또 여기로 당겨진다. 둘 다 잘 몰라서 그렇고, 어쩌면 앞으로 숙명처럼 고민할 문제라서 그렇다. 우리는 자기에 대해 쓰는 것, 남에 대해 쓰는 것을 곰곰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을 생각할 때 좀더 곤란해진다. 나는 자기기술지라면 일단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들을 만하게 자기 얘기를 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다른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임으로써 내가 확장되는 경험이 좋기도 하다. 이때 후자는, 부끄럽지만, 나를 좀더 이타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만족감을 수반했으니 모순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동네』 2026년 봄호에 실린 「어둡고, 뿌옇고, 뒤틀린」에서 인아영 선생님은 서보경, 양효실, 오은교 선생님의 좌담 「자기 이론 시대의 인류학적 성찰」의 한 대목을 가져오며, “자신의 경험을 타인의 경험보다 우선시하는 연구 방법론이 충분히 해명되지 않거나 기존의 이론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꼼꼼히 선행되지 않고서는 지식 체계로 인정되기 어렵다”는 엄격한 기준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어떤 글도 논리적, 개념적인 틀을 빌리지 않고서 그 자체로 이론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렇기에 문학의 오토픽션이나 수행적 글쓰기가 반드시 ‘자기 이론’을 지향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새삼스럽게 배웠다”고 쓴다. 문학에서 드러나는 '나'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관찰한 글이지만, 반드시 자기 이론을 지향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 자기 이론을 지향했다고 거기서 반드시 의미가 발생하는 건 아니라고 읽힌다.
동료가 작업 중인 책은 화교 역사학자 왕겅우의 회고록, 자기 전기를 서술한 책이니, 그의 고민은 깊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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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이자, 자식들에게 전하려고 쓴 글을 묶은 책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그의 아내가 자식들에게 남긴 글들도 엮여 있다. 사사로운, 단지 어느 집안의 이야기 아니냐고 의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말레이시아에서 자라고 중국, 싱가포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홍콩을 오가며 국적을 바꾸던 그의 디아스포라적 여정을 떠올리면 말이다. 그들이 그토록 성실히 글을 적어 자식들에게 전했던 건 유교 사상을 따라 전통을 중시하는 중국 가문이라서라기보다, 그들의 집이 결코 정주해 있지 않았으므로 기록으로 집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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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는 이 회고록의 존재 이유, 달리 말하면 정치성을 길어올리기 위해 의미를 탐색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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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성, 동남아시아 화교 등 거시적인 주제와 대결하던 선구적 역사학자가 노년이 되어 자기기술지를 시도한다. 이 책의 역자이자 역사학자인 김기협 선생님이 인용하듯 “역사가가 제대로 되려면 오래 살고 봐야”하는 걸까. 왕겅우는 싱가포르의 문화 전승 전문가에게서 과거를 구성하는 방식을 배웠다고 쓴다. “과거의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기술함으로써 당시의 '인간적인 측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회고로써 떠오르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재편되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11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이주해온 화교의 역사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여러 세계를 거치며 ‘집 아닌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중국계 소년이 다중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있는 곳이 집’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되는 과정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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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의 회고록이니만큼 서사는 역사가 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분명하다. 그러나 동료의 수심은 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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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을 편집하며 여러 번 길을 잃었다.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물론 저자에게 직접 묻는다면 그는 곧바로 명확한 이유를 여럿 댈 것이다. 우선 중국과 동남아시아 역사학계의 발전에 기여한 유명한 학자이니만큼(글항아리에서 작년에 출간한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의 저자 앤서니 리드는 왕겅우에게 헌사를 바친다), 그의 회고록은 서구 역사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동남아시아사, 그리고 화교사를 드러낸다. 기억과 기록의 장을 조직하는 권력 구조에 틈을 내는 시도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국내 독자에게 이 낯선 개인의 기록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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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아닌 곳에서』 『있는 곳이 집』 왕겅우 지음, 김기협 옮김(5월 출간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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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의 본질은 자기 얘기를 ‘남에게’ 한다는 데에 있다. 나와 동료는 함께 왕겅우를 생각했다. 그가 가진 쓰기의 기술 혹은 윤리가 뭘까. 왕겅우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정교하게 쓰고자 애쓰며, 어떤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끝없이 왕복한다. 이런 쓰기에는 과장할 필요가 없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쓰기는 담담히 서술되고, 우리는 비록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공명한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조용히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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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출신지, 자기 출생지, 성장한 곳, 공부한 곳, 일한 곳 모두 다른 왕겅우는 오랫동안 자기 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한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불안해질 때마다 지도책과 지명 목록을 떠올렸다. 그렇게 하면 기분 좋은 평온이 찾아왔다”고 적는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외국 생활을 오래 해본 적도 없는 내가 뜻밖에 그의 일화에서 위로를 얻는다. 나는 종종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어디에 정박하지 못하고 부유한다고 느끼는데, 그래서인지 살아가며 습득하는 정보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몰라 난감하곤 했다. 그런데 왕겅우의 습관을 알게 되자, 자리 잡지 못한 이야기들에 좌표를 찾아줄 수 있다는 믿음이 슬며시 고개를 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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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우리가 인간의 취약함으로 이어진다. 자기 얘기를 쓸 때 전제되어야 할 것이 투명한 독자라는 걸 배운다. 읽는 사람에게 당신이 알아서 행간을 메꾸라고 요청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동료는 왕겅우가 실천하는 쓰기의 태도를 역사학자라는 특수성, 이른바 직업병이 아닐까 유머 있게 말한다. 왕겅우의 자기 기술은 그 자신을 세우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요청한다. 독자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써달라고, 그것이 역사가 될 것이라면서.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인정의 윤리를 떠올린다. 변혁적이고 정치적인 인정의 윤리는 이미 존재하는 대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되기’를 요청한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서로가 되어보지 않고선 어떤 의미도 발생하지 않는다. 나와 동료의 숙명 같던 고민이 잠시 일단락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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