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본 책 구독자 여러분, 이번 호는 '이제 본 책'입니다. 장독대 프로젝트 ‘이제 본 책’
의심 많은 편집자 글쪽이와 욕망 많은 편집자 욕망의항아리가
글항아리의 구간을 살펴봅니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2013)
지난 1만6000년간 동서양 문명을 비교 분석한
최초의 통합적 역사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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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항아리 안녕, 글쪽이. 그거 알아? 요즘 벽돌책 읽기가 선풍적 인기라는……! (서동요 기법) 이번에 아나바다*한 책은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무려 1008쪽짜리 책이었어.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1만6000년의 역사를 고고학과 역사학, 생물학과 사회학을 동원해 살펴보는 책이야. 왜 서양이 지배하느냐는 질문에는 크게 두 가지 답이 있어왔는데, 단지 우연일 뿐이었다는 (찝찝한) 단기우연이론과 모든 필연이 현재를 결정했다는 (미심쩍은) 장기고착이론. 이 책은 어디에도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질문을 던져. 과연 그럴까?
*아나바다: 아껴 읽고 나눠 읽고 다시 읽고 바꿔 읽자.
글쪽이글쪽이 욕항이 안녕, 벽돌책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독서 근육을 단련하는 느낌이었어. 독서 차력쇼! 서로 응원도 하고, 책 읽는 시간을 영상으로도 기록해봤지…… 고됐지만 재밌었어.
욕망의항아리 패기 넘치는 시간이었어. 독서인의 기개란 이런 것일까. 우리 어쩌다 이 책을 읽기로 했지?
글쪽이글쪽이 글항아리의 정체성 중 하나가 벽돌책이라, 한번쯤 같이 격파해보고 싶던 차에 장강명 작가님의 『살면서 한번은 벽돌책』을 읽고 이때다 싶었어. 벽돌처럼 두꺼운 책이면, 양심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갈 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이언 모리스는 그런 점에서 절대 배신할 리 없는 저자라는 믿음이 있었어. 역사학자로서도 작가로서도. 그의 책을 편집했던 사람으로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일지도…… 책 어땠어?
욕망의항아리 뒤표지에 “지난 200년 동안 인류가 풀지 못한 문제” “1만6000년간 경쟁해온 동서양 문명을 나란히 비교 분석한 최초의 통합적 역사 이론”이라고 적혀 있거든. 1만6000년이라니, 책장을 슬슬 넘기는데 현생 인류가 태동하던 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야. 세상에, 그럼 이언 모리스는 이 책을 쓰는 데 얼마나 걸렸을지 궁금해지면서, 가만 보자, 나는 며칠 만에 읽었나 셈하게 되더라고. 집중해서 읽은 건 3일이려나.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지. 지난 200년 동안 인류가 숙고해온 문제, 심지어 1만6000년의 시간을 역사학·고고학적 관점으로 압축해 길어올린 해답을 3일 만에 알 수 있다? 이건 해야 한다.
다시 이 책을 한 줄로 소개해볼게. “지난 200년간 풀리지 않은 1만6000년의 비밀, 3일 만에 알려드리죠.”
글쪽이글쪽이 ㅋㅋㅋ 완전 혹하는데! 시간적으로도 1만6000년, 공간적으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길고 넓은 역사를 앉아서 보고 있자니, 살짝 삼라만상을 굽어보는 신이 된 듯한 느낌이 들더라. 무상하기도 하고. 모리스가 역사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고, 한 인간이 천재거나 악한이어서 역사를 바꾸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적겠구나 싶어서. 난 이렇게 소개해볼까. “전지적 신 시점에서 빙하기로 회귀해보시죠.”
욕망의항아리 우리 둘 다 사기꾼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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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라는 질문
욕망의항아리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려면, 서양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하잖아. 근데 이 책이 쓰인 2010년대와 지금 2026년은 꽤 다른 것 같아.
글쪽이글쪽이 그러게. 지금 서양이 지배하고 있는 게 맞나 의문이 생기더라.
욕망의항아리 이런 생각도 들었어. 미국이 전쟁을 치르며 패권을 쥐고 전 세계를 뒤흔드는 오늘날, 글로벌 북반구가 글로벌 남반구를 파괴하는 오늘날, ‘지배’라는 단어는 다소 중립적이다. ‘어쩌다 서양은 그 지경이 됐나’ ‘서양은 언제까지 제집 부엌 어지르듯 지구를 들쑤실 거냐’ 이렇게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모리스는 서양과 동양의 ‘사회발전지수’*를 기준으로 세계를 누가 지배해왔는지 분석·서술하잖아. 태초 인류 문명은 서양 주도하에 발전했더라도 동양이 약 1200년간 서양보다 높은 발전지수를 기록했던 시기가 있었고. 그런데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다시 서양의 지배가 시작되더니, 지금까지 동서양 모두 점점 더 높은 사회발전지수를 이룩해왔음에도 여전히 서양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결국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에 18세기 산업혁명은 매우 주요한 원인으로 제시되는데, 그 혁명을 추동했던 원인이 더 큰 부, 더 많은 자본을 향한 인간의 욕심이었다니, 다소 허무했어. 어느덧 세모눈 뜨고 있는 나를 발견했지.
그래, 서양의 지배고 뭐고, 자—랑이다, 이런 감상?
*사회발전지수: 네 항목(에너지 획득 능력, 도시성, 정보처리 능력, 전쟁 수행 능력)을
시대별 변화 유동성을에 따라 변동 측도로써 측정한 지수. 서양과 동양을 어디로 정의하는지는 230~233쪽.
글쪽이글쪽이 모리스가 서술하는 역사는 탐욕스럽고 게으르며 겁 많은 인간끼리 얼렁뚱땅 우당탕탕 살다 보니 이렇게 흘러왔다는 식인데. 이런 역사에서는 급진적인 상상들, 예를 들어 우리가 탐욕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마음이 어떻게 서술될 수 있을까 궁금하더라. 가령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는 대목도 있지만, 그마저 여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사상 중 하나로 해설되니까.
그래도 저자가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고도 생각해. 서양만큼이나 동양 역사를 다루고, 서양에 관해서도 미국, 영국 같은 서유럽이 아닌 이란, 이스라엘 등 중동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니까. 서양 지배의 원인을 논증할 때도, 서양의 지배를 문화나 유전자 같은 본질적인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 동양이 지배했던 시기도 있고 어쩌면 지금까지 지배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게 여타 서양 중심적 서술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가령 이런 대목에서는 의문이 들더라. 서양은 지리적으로 아메리카 대륙과 가까웠고 서로 계속 싸우면서 함대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면, 중국은 아메리카 대륙과 멀고 초원이 봉쇄되면서 그들만의 안정적인 전제정을 꾸리고 사느라 발전할 동력이 없었다고 하는데, 중국의 전제정이나 관료제를 ‘진보’의 반대축으로 개념화하고 있는 것 같아서.
욕망의항아리 나도 같은 지점에서 ‘어라?’ 싶었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청나라에서도 과학자나 철학자 들이 서유럽의 학자들처럼 과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진지하게 연구했지만, 그 방향성이 내부로 향했기에 고대 문헌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거기서 이론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고. 그래서 서유럽만큼 기술과학이 빠르게 발달하지 못했다나. 그런데 이런 해석은 시대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이 달라지잖아. 현대에는 중국이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던 힘을 그들의 고전으로부터 지혜를 발굴하는 태도나 내적으로 축적된 사상을 보존 및 발굴하는 저력에서 찾듯이 말이야.
글쪽이글쪽이 이 책에서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를 비교하는 기준으로 삼는 사회발전지수가 한계를 정해놓는 감이 있지. 이 지수는 서양의 발전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동양의 발전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지 않은 것 같아. 예를 들어, 알렉산더 우드사이드의 『잃어버린 근대성들』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과거제를 기반으로 확립한 관료제에서도 근대성이 있다고 주장하더라고. 이렇게 발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달라질 텐데 말야.
욕망의항아리 글항아리에서 곧 선보일 책에서 우리의 의구심을 설명해줄 대목을 찾았는데, 슬쩍 선공개해볼까. 『걷잡을 수 없는 악의A Mind for Murder』에서 올스턴 체이스는 이렇게 말해. “인류가 진보하면 할수록 그들의 죄도 더 커진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사악함이 인간의 진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진보 때문에 증가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체이스는 ‘지식의 위험’이라는 주제가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등 그리스 희곡 전반에서 반복되었으며, 이 이야기들이 경계하는 것이 다름 아닌 ‘휴브리스Hubris’, 즉 오만함이라고 말하지. 그리스인들은 휴브리스를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을 자신보다 더 큰 뭔가의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라고 믿었대. 지식은 자고로 한계와 통제를 따르는 미덕을 지닐 때에만 고귀함을 지닐 수 있다!
- “지식은 영구적으로 미덕과 붙어 있어야 했다. 이러한 결합을 가능케 하는 접착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미덕을 위해 지식을 제약하는 일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핵심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텔로스telos라는 개념, 즉 “고유한 목적”이었다. (…) 뭔가를 안다는 것은 자연에서 그 대상의 적절한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어떤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이어야 하는가도 이해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이 세계에서는, 사실과 가치가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떨까. 16세기 후반부터 신앙과 미덕, 지식의 일치에 대한 전망은 해체됐고 텔로스야 뒷전이 된 거야. 미덕과 도덕은 감정적인 소요일 뿐이라며, 옳고 그름은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해. 대신 관찰에 근거한 지식, 수학적 조작과 분석으로 충분하다는 이론화의 맹신, 실증주의의 약진. 이런 기조 위에 세워진 현대의 연구와 합리적으로 도출된 결과를 보며 어떤 공허함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반응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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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책의 맛
욕망의항아리 벽돌책만의 묘미가 확실하더라. 장강명 작가님이 『살면서 한번은 벽돌책』에서 이런 말을 하거든. 활동 반경이 수십 킬로미터인 곰에게 10제곱킬로미터짜리 자연보호구역 열 곳을 만들어주는 것보다 100제곱킬로미터짜리 자연보호구역 한 곳을 만들어주는 게 낫다(96~97). 곰처럼 힘이 세고 활개 치는 사유가 있으려면 그만한 공간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어. 300쪽짜리 책 세 권이 아니라, 1000쪽에 걸쳐서 1만6000년을 관통하고 세계를 아우르면서 각 사건이 영향을 주고받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만한 부피의 책이어야지 역사를 ‘뚫고나가는 직관’이 읽는 사람한테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겠다 싶었어.
글쪽이글쪽이 완전 동의해. 이 책에서 일관적으로 뚫고 나가는 주장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후진성의 이점이나 발전의 역설 같은 개념들. 한 나라가 발전해가는 과정과 이후에 다른 나라가 뒤따르며 더 잘나가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려면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사회발전이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는 힘 또한 만들어낸다는 역설을 보여줄 때도 그렇고. 이 개념들 자체도 새롭고 흥미로웠어.
욕망의항아리 시대마다 도래하는 ‘축의 사상’을 훑어주는 것도 재미있지?
글쪽이글쪽이 맞아, 불교, 기독교, 유교, 도교 등 종교 및 사상들, 『길가메시 서사시』라든지 『여씨춘추』 같은 주요 문헌들도 세계사에서 어느 시점에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려주는 역사 교양서로서의 면모가 있더군.
욕망의항아리 훌륭한 교양서지. 게다가 모리스는 이 책의 두께만큼이나 아주 두껍게(넓게) 서양과 동양을 정의하잖아. 최초의 농업혁명이 유래한 곳들로부터 서양과 동양을 정의하는데, 지금의 중동 부근, 측면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곳이 서양, 양쯔강과 황허강 유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곳이 동양!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을 밀어붙이는 내내 아주 크고 넓은 서양과 동양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좋았어. 이야말로 모리스의 특별한 관점이자 독특한 사고의 전환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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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의 역사관
글쪽이글쪽이 12장에서는 미래를 예측하지. 모리스는 2013년이면 동양이 서양을 제치는 때가 올 텐데, 중요한 건 그 이후라고 해. 기술 발전으로 인간이 기계와 융합해서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거듭나는 특이점을 맞느냐,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해질녘을 맞느냐, 기로에 놓였다고. 사회 붕괴를 불러오는 묵시록의 기수로 꼽은 질병, 기후변화, 기근, 이주, 국가실패가 이미 다 왔다면서 자칫하면 핵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지?
욕망의항아리 기후위기부터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게 의아하다.
글쪽이글쪽이 그러니까. 모리스가 핵부터 우려하는 게 흥미롭더라. 지금까지는 인류가 수많은 전쟁을 치렀어도 세계 전체, 인류 역사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는데, 인간이 지구 전체를 날릴 만큼의 핵을 가진 지금은 세상과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지. 기후 변화로는 이렇게 바로 모두가 죽지 않을 거라면서.
욕망의항아리 나는 곧바로 인류세가 떠올랐거든. 인류의 활동이 지구 환경과 생태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그 영향권 아래에 현 세대와 미래 세대가 살아간다면, 1만6000년의 역사를 보는 관점과 동서양 문명과 발전을 다루는 시선의 각도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기후 변화를 묵시록의 기수로서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거나 이 또한 으레 그러했던 역사적 패턴으로 납득할 게 아니라, 진보와 발전의 미명하에 전 지구적 생태계 변화를 주도했던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어?
글쪽이글쪽이 마지막에 미약하게나마 그런 의지를 드러내는 것 같은데 어때? 역사의 패턴을 파악해보니, 우리가 서로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사이좋게 지내며 기후위기도 극복하고, 핵도 막아보자고 하잖아. 역사의 의의도 인류가 행동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 같고. “역사가만이 인류를 나누는 차이점을 설명하고, 그러한 차이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을 인류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설명할 수 있다.”(855)
욕망의항아리 충분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키플링의 시를 인용하는 대목은 감동적이더라.
- “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 그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하리라, // 땅과 하늘이 머잖아 신의 위대한 심판의 자리 앞에 설 때까지는. // 그러나 동양도 서양도 경계도 혈통도 출생도 없다, // 힘센 두 사내가 서로 마주설 때는. // 비록 그들이 세상 끝에서 왔을지라도!”(854)
“힘센 두 사내가 서로 마주 설 때”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낙관을 읽었어. 그러나 역시 서로를 알아보려면 그 전에 자기부터 반성적으로 되돌아봐야 하니까. 모리스의 관점에 기대서 모든 일이 거시적 패턴에 따른 필연이었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축소하고 싶지는 않아. 서양이 산업혁명에 정신없을 때, 중국은 함대도 안 만들고 일본도 우리끼리 화목하게 사는 게 낫겠다고 돌아섰는데, 누가 들쑤셨지? 동양인의 억하심정인지…… 나는 진지한데 모리스의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 문체가 나를 더 열받게 했지. 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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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쪽이글쪽이 ㅋㅋㅋ 정말 유머를 열심히 넣으시더라.
욕망의항아리 책에 모리스의 어릴 적 사진도 넣었잖아. 진짜 웃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글쪽이글쪽이 ㅋㅋㅋ 이번에 편집한 『지리는 운명이다』에도 자기 사진 넣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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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항아리 우리가 모리스의 역사관으로 거대한 패턴을 발견해낸다 한들 지금의 파국에 맞설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완전히 변혁적인 결단이 아닐까?
글쪽이글쪽이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걸 말하는 거야?
욕망의항아리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나는 ‘내가 누구인가’ ‘나는 세계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사유할 때 역사적 감각을 가지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동시에 역사라는 틀로 포착할 수 없는 비역사적 사건들도 발생하잖아.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야. 음, 가령 우리 모두 자본주의를 필수불가결한 전제이자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이지만, 비주류일지언정 그런 전제에 반기를 들고 탈자본주의, 완전히 변혁적인 세계를 꿈꾸는 움직임이 있잖아. 어쩌면 이제 역사가 만들어낸 패턴 밖에 비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내겠다는 결심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덜 역사적인 것, 패턴으로 포섭되기에는 너무나 불규칙한 것을 상상하고 싶어.
글쪽이글쪽이 흥미로운 얘기다. 저자는 반대로 역사를 수정하면서 역사 아닌 것을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는 것 같은데. 예를 들어 모리스의 후속작 『지리는 운명이다』에서는 그의 고향이자 브렉시트의 수도라 불리는 스토크온트렌트 주민들을 역사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어. 브렉시트를 반대했던 국제주의적 좌파 엘리트들은 압도적으로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스토크 주민들을 악덕하거나 무지하거나 끔찍하다고 여기곤 하지만, 브렉시트를 둘러싼 논쟁은 역사적으로 되풀이된 정치적 흐름의 일부였다며 설득하더라고.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도 한계가 뚜렷하지만, 기존에 우생학, 제국주의 등 서양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본질화했던 역사를 수정하면서 동양을 역사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보이고.
욕망의항아리 저자의 시도를 존경하는 마음도 물론 있어. 아주 먼 과거로까지, 하물며 기록조차 되지 않은 세계로까지 눈을 돌리고, 그러모은 사료들을 역사로 해석해내는 사람이 있어야만 우리 또한 그걸 훑어라도 볼 수 있으니까. 모리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패턴을 찾아냈을 테고. 나처럼 그 패턴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긴 쉽지. 장기고착이론이냐 단기우연이론이냐, 두 가지 관점이 우세하던 학계에 모리스 덕분에 비로소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관점이 들어섰고 말이야. 하지만 이게 또 독서의 맛 아니겠어? 저자 맞은편에 서서 끈덕지게 딴지를 거는 것.
글쪽이글쪽이 모리스가 프린스턴대학 ‘인간 가치에 관한 태너 강의’에 초청받아 강연을 했는데, 마침 마거릿 애트우드도 강연을 하러 왔었대. 사람들이 애트우드에게 “당신은 미래의 인간을 다루는 공상과학소설을 쓰니까, 이 사람의 강연을 들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애트우드가 모리스의 강연을 들은 거야. 강연을 듣고 그녀가 이렇게 말했대. “나는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다. 이야기란 인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이상한 사람이 말하는 그런 새로운 세계로 우리가 들어선다면, 이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인간적인 흥미는 죽고, 우리가 삶을 살 만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모리스가 최근 인터뷰에서 애트우드의 이 말을 인용하며 우리의 고민이 쓸모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말이라 열받더라고. (화쪽이로 개명할까?) 모든 고민이 해질녘으로 사라지든, 특이점을 지나 판이 바뀌든, 그 과정에서 인간과 세상이 겪을 고통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그렇게 봤을 때 모리스의 이야기에는 한계도 있지만, 적어도 모리스가 역사로 끌어오려던 고향 사람들, 어쩌면 ‘레드넥’ ‘이대남’, 먹고사는 문제를 중시하며 사회발전지수가 전제하는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희망을 품고 있어.
욕망의항아리 그래, 역사 또는 어떤 거시적이고 막강한 이야기가 버티고 서 있더라도 무력해지지 말자. 모리스의 관점 역시 우리가 희망을 찾을 근거로 쓴다면 불가결할 테니까. 모든 이야기를 읽고도 어떻게든 틈을 찾아내려 하는 우리라면! 나는 화쪽이 모드 좋아.
다음 호에서 읽을 책은 『자백의 대가』야. 자백의 대가를 치르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자백을 이끌어내는 대가의 이야기인 걸까? 또 누가 예측할 수 없는 곳에 틈을 내고, 또 어떤 이야기가 생겨난 걸까. 다음 대화에 함께하고 싶은 분은 연락해주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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