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본 책 구독자 여러분, 이번 호는 '이제 본 책'입니다. 장독대 프로젝트 ‘이제 본 책’
의심 많은 편집자 글쪽이와 욕망 많은 편집자 욕망의항아리가
글항아리의 구간을 살펴봅니다.
『주변의 상실』(2022)
세계적인 인류학자, 중국의 공공 지식인 샹뱌오가
들려주는 혼돈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방법으로서의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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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항아리 우리, 이 대화 잘해낼 수 있을까?
글쪽이글쪽이 지금 드는 생각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기’. 결과물이 나오면 샹뱌오처럼 우리도 물질적 조건을 역으로 분석해보자. 책 읽으면서 나는 샹뱌오가 찐이라고 생각했어. 동창회에 가서도 사람들을 연구하고 있더라…… 그들이 차별적인 말을 해도 넌더리 내지 않고 그들의 말과 그 말이 발화된 구체적 조건을 요리조리 탐구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인류학자답고 그렇게 탐구하다 보면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되기도 했어.
욕망의항아리 그것이 바로, 책에서 강조하던 실증적으로 사고하기! ㅋㅋ 나도 책 읽으면서 인류학적 글쓰기를 해보고 싶어지더라. ‘이해’라는 단어가 샹뱌오에게는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아주 정밀한 방법론으로 실천되는 단어라는 게 느껴졌어. 이외에도 부근, 대화 같은 단어들도 모두 제자리에서 발화된다고 할까.
요즘 내가 꽂힌 주제가 ‘대화’이기도 하고, 좋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거든. 동시에 그 ‘좋은 대화’라는 게 점차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씁쓸함과 체념이 있었고. 이 책이 나한테 가장 긴요하게 알려준 하나의 진실이라면, 우리가 여전히 대화할 수 있다는 것, 단지 가능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실증적인 대화의 방법론으로써 가능하다는 점 아닐까 싶어. 한 명의 인류학자가 되어서 내 부근부터 탐색해나가다 보면, 나와 다른 가치관, 다른 계급,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봤어.
글쪽이에게 이 책이 알려준 가장 긴밀한 점은 어떤 거야?
글쪽이글쪽이 나는 편집할 때 부족함을 느끼고 자책할 때가 많거든. 이 난관을 차근차근 타개해보자 싶다가도 무한 자책의 굴레에 빠지거나, 무작정 앞으로 달려가곤 했지. 이 책은 내게 내 위치를 살펴볼 방법과 여유를 준 것 같아. 마치 “눈앞에 보이는 빨간색 물건을 말해보세요” 같은 감각 기반 심리치료처럼 샹뱌오의 말에 따라 내 위치를 상대화해서 바라보면, 지금 내 위치, 그 위치가 비롯된 역사를 초조함을 던 채로 마주하게 되더라고. 이런 대목에서 말이야.
“당신이 어떤 일을 하고, 이 일을 하면서 왜 어떤 때는 기쁘지만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은지, 월급은 얼마이며 전체적인 업무를 어떻게 배치하는지, 당신은 어디에 사는지 (…) 등 이런 것들에 더 관심을 갖는다면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불안이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희로애락의 사회적 기원도 알게 되겠죠. 이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가 있으면 됩니다.”(478)
욕망의항아리 샹뱌오의 신간 『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들기』(2026, 이하 『부근』)에서 마침 “감정, 고민, 갈등, 그리고 역사를 발견하는 행위”(35)가 '관심'이라고 했는데, 글쪽이의 변화가 자기를 향한 관심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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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하며 초라한 세상을 바라볼 용기
욕망의항아리 나도 좋았던 대목을 소개해볼게.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이 비루하며 초라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291) 예술의 기능을 설명하던 대목이지만, 나는 이것이 이 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샹뱌오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한 말이라면, “비루하고 초라한 세상”일지라도 주어진 현실로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리고 이 세상을 “용기를 가지고” 본다는 점이 참 좋더라고. 책에서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구체적으로 보고, 실증적으로 사고하고, 어떤 상징 언어나 기호 들에 현혹되지 않고 실제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잖아. 그렇게 하려면 역시 용기가 필요하겠지.
글쪽이글쪽이 이런 문장이 ‘대화하자’ ‘일상에서 시작하자’ 구호만 보면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들을 그렇지 않게 해주는 문장 같아.
욕망의항아리 그치, 샹뱌오의 인류학적 방법론이 실제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일 텐데, 「왜 초조함을 느낄까」 챕터에서도 그런 점이 잘 느껴져. 샹뱌오가 이 챕터 끝에서 말하지, “모두가 ‘참된 마음誠’에서 시작해 천천히 참된誠實 방식으로 자기 경험을 써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많이 쓰다 보면 진짜가 남을 겁니다. 그때 ‘쪼잔하게’ 다투는 식의 ‘참된 태도誠實’는 지나가고 천천히 참된 느낌과 정말 중요한 일들을 결합해서 볼 수 있게 되겠죠. 이게 제가 희망하는 바입니다”(296)라고. 이 말이 희망차게 들리더라. 쉽게 비관하지 않는 어른의 존재가 든든하게 느껴지고, 이런 어른이 기다려주고 지켜봐준다면 뭐든 해볼 수 있지 않나 싶었어.
글쪽이글쪽이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참된 방식으로 말하지. 자기가 겪고 있는 곤혹들을 솔직히 밝히는 점이 믿음직스러웠어. 어렸을 때 읽기와 거리를 뒀다거나, 지금 동서양 사이에서 혹은 인류학과 정치 문제 사이에서 돌파구를 못 찾고 있다거나, 글을 쓰고 있으나 임팩트는 없는 것 같다거나…….
욕망의항아리 맞아, 그 말 자주 하더라.
글쪽이글쪽이 이분도 나처럼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배우고 있구나 싶고. 첫 대담에서는 인터뷰어 우치가 어린 시절을 궁금해하니까 이렇게 대답하잖아. 학자로서 대담하는 데에 사상이 중요하지 개인의 서사가 중요하진 않다는 식으로. 그러다가 두 번째 대담(264~266)에서는 생각이 바뀌었지.
욕망의항아리 결국 어떤 이야기든 자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잖아. 세계에 대해 말하려면 내가 이 세계를 왜 이렇게 바라보는지, 연구에 대해 말하려면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이기에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말할 수밖에 없지. 하하, 번뜩이는 깨달음은 아닌걸?
글쪽이글쪽이 ㅋㅋㅋ 그러게. 세대가 달라서 그런가?
욕망의항아리 그럴지도! 예를 들어 우리 세대에는 자기 기술지나 자기 이론을 쓰는 게 생소하거나 난해한 일은 아니잖아. 오히려 우리는 샹뱌오가 경계하던 속 빈 강정 같은 말들에 진절머리 내는 것에 익숙하고, 번지르르한 정치적 발언을 매섭게 노려볼 줄 아는 세대라고 생각하거든. (글쪽이와 욕망의항아리는 30대 초반이다.) 그래서 사실 샹뱌오의 발견에 깜짝 놀라기보단, 그와 같은 태도와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다짐을 거듭하는 읽기였어.
글쪽이글쪽이 이 책을 읽으면서 거듭한 다짐이 있어?
욕망의항아리 20대 후반에 ‘내가 주변에 별 관심이 없구나’ 하고 벼락 맞듯이 깨달은 적이 있거든. 깨닫고는 수치스러웠어. 그래서 스스로 몇 가지 약속을 했지. 사소하게는 ‘기색을 살피며 살자’. 옆 사람이 평소와 다르다면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묻는 사람이 되자. 좀더 넓은 차원의 약속은 더 넓은 ‘연대체를 찾자!’ 근데 어떤 결심이든 하루에도 수차례 무너지더라고. 하나, 이런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는 거지. 나를 직시하고 부근을 살피자면서. 감상이 다소 자기계발서를 읽은 소감 같다.
글쪽이글쪽이 근데 진짜 그렇게 읽히기도 해.
욕망의항아리 십계명 제1조, 너 자신을 알 것.
글쪽이글쪽이 ㅋㅋㅋ 이 책을 읽는데 정말 자기계발서처럼 달콤한 거야. 그대로 하면 다 괜찮아질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이렇게 읽어도 되는 걸까 경계하게 되기도 했어.
요즘 대화와 관련된 책이 부쩍 잘 나가고, 그런 책들 대부분이 느린 대화 혹은 주변과 관계 맺기를 주장하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이 있어. 책이 성취한 열매를 빠르고 경제적으로 취하고 싶다는 욕심에, ‘세 줄 요약’하듯 핵심만 읽으려 할 때가 있거든. 그러다 보면 비슷한 주장하는 책들이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어떤 성취를 했는지 놓치게 되더라. 그래서 샹뱌오가 주장하는 바, ‘방법으로서의 자기’ ‘부근의 소실’, 이런 개념들에 너무나 설득되지만, 이런 주장으로 환원하지 않고 다른 특별한 점들도 읽어내고 싶어.
날카롭다, 새롭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어. “중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다음 세대들이 정하게 하면 된다.”
욕망의항아리 “우리가 꼭 그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청사진을 만들어줄 필요는 없다.”(109)
글쪽이글쪽이 응. 그런 문장이나 혹은 요즘에 ‘러시아의 근대성이란?’ ‘중국의 근대성이란?’ 이런 질문에 골몰하는 책들을 계속 편집하고 있는데, 샹뱌오의 책은 이러한 거대 담론과 거리를 두고 중국의 근대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게 재밌었어. 이런 지점들을 계속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내가 잘 읽고 있는 걸까. ㅠㅠ
욕망의항아리 난 대담집을 많이 안 읽어봤거든. 대담 형태를 띠고 있더라도 『책임의 생성: 중동태와 당사자연구』(에디토리얼, 2025)처럼 주제가 명확하고 완결된 구성이 있는 강의록을 읽었어. 근데 이 책은 대담집이고, 화자들이 방담을 하잖아. 어떤 주제를 파고들기보다는 자유롭게 전반을 아우르는 말하기. 그렇다 보니 생애 이야기도 했다가 연구 이야기도 했다가……. 주제가 곁가지로 뻗어나가더라고. 근데 이 책이 이런 서술 방법을 택한 거겠지?
『부근』에서 이런 서술이 가진 의의에 대해 힌트를 발견할 수 있는데 한번 읽어볼게. “안생식 사고는 개방적이고 끊임없이 다양한 경험과 생각 사이를 오가며 스스로를 교정하도록 한다. 이러한 사고의 목적은 결론을 도출하는 데 있지 않고, 심지어 명확한 방향조차 없다. 그러나 그 단계마다 경험에 더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생각을 현실에 더 가깝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44) 뾰족한 결론을 내진 않더라도, 물속을 헤엄치거나 숲속을 거닐 듯이 사고하자는 게 샹뱌오의 제스처가 아닐까. 한편 샹뱌오가 종종 본인이 쓰는 연구 논문에 ‘임팩트’가 없다고 말하잖아? 우리가 익숙한 화법도 ‘임팩트’를 주는 화법 같아. 하지만 애초에 화법을 달리한 책이라면, 독법도 달리할 수 있지 않을까. 임팩트를 기대하기보다, 연구자로서 살아온 샹뱌오라는 인물이 그리는 비전과 세계, 그의 낙관과 비관, 태도와 자세를 읽어보는 거지. 이 지점은 확실히, 아주 논리적으로 전달됐다고 생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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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천은? 부근을 만들기
욕망의항아리 샹뱌오가 말한 것들을 ‘세 줄 요약’할 수는 있는데…… ‘실천’의 문제가 남아. 실천하자고 생각해보면 이 책의 모든 문장이 하나도 간단하지 않은데, 너무 간단히 읽은 게 아닐까. ‘이런저런 태도를 배우겠다!’ 근데 ‘어떻게 실천할 거야? 직면한 문제가 뭐야?’ 이렇게 물어보면 제대로 답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출판이라는 생태계에 대해서도 내가 어떻게 연루되어 있으며 그걸 얼마나 감각하고 사는지 내 언어로 말하기가 어렵고 가족, 친구, 애인과의 관계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야. 요즘 나는 애인과 결혼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우리한테 결혼이란 뭔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진단해본 적이 없더라고.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루자니 어색하기만 하고. 상실된 주변을 회복하자는 말을 실천하기란 이다지도 어렵구나.
글쪽이글쪽이 맞아. 그러고 보면 이번 신간이 이 책의 실천편 같은 느낌이네. 나도 샹뱌오의 말엔 동의하지만 실천은 다른 문제지! 하고, 『부근』을 팔짱 끼고 읽기 시작했거든. 경비원, 동물, 식물 등 우리 주변의 낯선 존재에 관한 전문가를 샹뱌오와 동료들이 인터뷰하는데, 샹뱌오의 인류학적 관찰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낯선 존재 전문가들은 어떻게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구체적 사례들을 볼 수 있어 좋더라.
욕망의항아리 맞아. 좀더 치열한, 현장에서의 이야기지.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고.
글쪽이글쪽이 개인적으로 동물권에 관심이 많아서 흥산삼림동물원 원장 인터뷰부터 봤는데, 동물권의 관점에서는 사실 동물원은 그 존재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인간 중심적인 장소잖아. 그래서 의심하면서 읽기 시작했어. 생태 다양성이라느니 다종 관계 맺기라느니 뻔하고 낙관적인 이야기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생각했지…… 물론 그런 이야기도 나왔어. 그러다가도 샹뱌오는 인간-동물 관계의 모순이나 동물원의 한계를 파고들더라고. “동물원의 흥미로운 점은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이 타자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임을 알려주는 데 있다”(301)라면서. 그가 『주변의 상실』에서 말한 인류학적 방법론을 날카롭게 실천하고 있구나 싶더라고. 그가 직업적 인류학자이기에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우리가 인류학적 태도를 실천하려면 어떤 물리적 조건을 마련해야 할까?
욕망의항아리 “사유 과정은 하나의 물리적 과정입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특정한 사유의 결과물이 나옵니다”(443)라는 문장이 떠오르네. 무엇이든, 어디에서든 재료를 채굴할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결혼에 대해서라면, ‘신혼부부 전세 지원’에 얽힌 부동산이라는 물적 토대부터 검토해보면 어떠려나. 그러다 보면 모순 역시 보이잖아. 전통적인 가족 상과 재생산이라는 기치, 동성 간 혼인 법제화를 둘러싼 갈등…… 모순에서 비롯한 질문을 주무르면 또다시 길이 열리고…… 무한히 사유할 수 있겠는걸? 자기로부터의 대화란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어려운 일이네.
글쪽이글쪽이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이론을 만들다가 자기에게만 적용되는 이론을 만들까봐 걱정도 돼. 책에서도 청년들이 폐쇄된 체계에 갇힌다고 하잖아. 자기 머리 안에서만 생활하다가는 자기 생각만 강화하게 된다고. 아아, 그래서 부근을 이야기했지;; 수다 떠는 아주머니(362~363)를 보라면서, 아주머니는 자기 얘기를 이렇게도 잘 한다고.
욕망의항아리 스몰 토크의 귀재시지!
글쪽이글쪽이 결국 ‘방법으로서의 자기’를 잘하려면 낯선 이들, 부근과 관계를 잘 맺는 것부터가 시작이로군.
욕망의항아리 자기부터 잘 알아야 하지만 자기를 중심에 놓으라는 건 아니니까. 내 세계는 그저 작은 세계에 불과하다며, 나를 ‘대상화’하고 ‘주변화’하라고 하잖아. 이 지점이 이 책이 가진 의외성이 아닐까. ‘탈중심하십쇼’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대상화해보라는 제안은 다르니까. 그럼 내재적인 세계에 골몰하기보다 어쩔 수 없이 주변으로 시선이 뻗칠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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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대와 대화가 가능할까
욕망의항아리 내가 궁금한 건 글쪽이는 공허감을 느껴?
글쪽이글쪽이 무력감은 느껴도 공허감은 못 느끼는 것 같아.
욕망의항아리 나도! 근데 책에서 청년 세대 분석할 때, 특히 극우 성향의 기저 원인으로 ‘정신적 공허감'(484)을 꼽잖아. 그 실체가 과연 뭘까.
마침 토끼풀과 시사인의 협업 기사를 읽었는데, 중고등학생 서른 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된 기사였어. 인터뷰이로 참여한 학생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고인의 사진을 AI로 우습게 합성한 사진을 친구들에게 뿌리고 낄낄거린다는 거야. 그래서 학생들한테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물어봤는데, 진지하게 극우를 지지한다거나 자기 논리를 가진 학생은 한 명도 없고, 그저 이 문화가 재밌어서, 안 끼면 재미없어 보일까봐 한다는 거야. 또는 금기를 깬 듯한 쾌감 때문이래. 그렇다면 ‘공허감'으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나? 사실 그저 재미 때문이라면? 혹은 대세에 휩쓸린 채 낄낄거리는 게 편해서 현상을 유지하는 거라면?
글쪽이글쪽이 그러게,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게 내게 공허감을 주기는 하는데, 그들이 공허감을 느낀다고 보기에는……. 청년 세대 분석, 이거 참 어렵다. 이 책 자체가 청년과의 대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던데. 특히 1부 대담은 쉬즈위안과 우치가 ‘대화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의도로 기획했고, 샹뱌오는 이 대담으로 당대 중국 청년과 보통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지(550). 샹뱌오는 왜 청년과 대화하고 싶었을까 궁금해지네. 굉장히 실패하기 쉬운 일이잖아.
욕망의항아리 맞아. 다른 세대와의 대화가 과연 가능할까.
글쪽이글쪽이 그러게. 샹뱌오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슬럼프를 겪던 중에 중국어로 중국 관련 칼럼이나 인터뷰를 냈는데, 중국 청년들 사이에서 큰 호응이 일었고 그것이 본인에게 자신감과 연구의 의미를 줬다고 말했었지(110~111). 이런 계기가 있었다지만, 그게 다일까.
욕망의항아리 어쩌면, 샹뱌오는 본인을 공공 지식인으로 정체화하고 있으니까 책임의 관점에서도 계기를 마련하지 않았을까? 특히 샹뱌오는 앞 세대가 정리해서 내려보낸 걸 답습하는 데에 큰 관심이 없잖아. 그렇다면 더욱이 다음 세대의 생각이 궁금할 것 같아. 샹뱌오라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
글쪽이글쪽이 한번은 한국의 인터뷰어가 샹뱌오에게 현재 청년들이 시진핑 체제, 현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었잖아(515). 샹뱌오는 청년들 사이에서 여러 입장이 있고 지지 입장을 철회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답했지. 물어보는 인터뷰어도 조심스럽고 샹뱌오의 답변도 다소 짧고 모호한 편이라, 이게 중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인지, 거대한 혁명보다는 일상에서의 갱신을 추구하는 샹뱌오의 태도에서 비롯된 건지 궁금했어.
욕망의항아리 이 책의 강점이 날카로움에 있진 않지. 아까 얘기한 청년 세대의 극우 성향을 다루는 대목(501~502, 515)도 좀더 날카롭게 얘기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극우 얘기를 하면서 성별 얘기를 하지 않으면 이 문제의 맥을 제대로 짚을 수 있을까. 또 페미니즘도 몇 차례 언급되는데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좀더 눈을 가늘게 뜨고 보게 되더라고. 샹뱌오가 인류학자로서 친구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시시껄렁한 성차별적인 농담을 저지하지 않았을 때, 나는 그다지 동의하지 못했던 거 같아.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정정할 수 있어야지. 인류학자라면 인류학자로서 대화를 통해 정정하면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어.
글쪽이글쪽이 앞서 샹뱌오는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대안으로서 ‘향신鄉紳’, 즉 중심에 동화되기보다는 주변의 일상 세계를 관찰하고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는 인물 유형을 제시했잖아. 그리고 향신이라면 윤리적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지(34). 「제3의 선생」이라는 글에서도 ‘모(자) 선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말이야, ‘사이Science 선생(과학)’과 ‘데democray 선생(민주)’에 제3의 이념, ‘모Morality 선생(도덕)’이 필요하다고 하셔놓고서는(66)!
욕망의항아리 모 선생을 머리에 이고 지고 살 필요는 없대도, 모자라면 언제 쓰고 벗어야 하는지 알아야지 않겠어? 『부근』에서는 향신으로서의 샹뱌오가 좀더 두드러지는 것 같던데, 첨예하다고 할까? 글쪽이는 어땠어?
글쪽이글쪽이 『주변의 상실』을 보면서 자기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면, 『부근』을 읽으면서는 그 이해를 주변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어.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모자를 벗어던지고 인사할 시간이다! 구간을 읽으니 흐뭇한 맛이 있다. 지금도 유효한 목소리를 아껴 읽고 나눠 보고…… 아나바다 하는 흡족함이랄까. 한없이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자본주의 열차에서 잠깐 딴짓하러 나온 거 같아서 낄낄 신나고, 대화를 콘텐츠로 다듬으면서 우리에게 여러 차례 대화할 기회가 있다는 점도 좋았어. 내 중요한 부근은 욕망의항아리거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욕망의항아리 ‘아나바다’가 이 대화 끝에 소환될 줄이야! ‘아끼고 나누며 바꿔가며 다시 읽자.’ 오늘 우리의 시도에 꼭 겹쳐지는 말이네. 글쪽이의 부근으로서, 대화 상대로서, 함께 읽기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오늘의 대화를 오래 곱씹을게.
다음 호에서 같이 읽을 책은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지? 마침 글쪽이가 같은 저자의 『지리는 운명이다』를 최근에 편집했잖아. 우리의 대화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기대하시라. (곧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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