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본 책의 열다섯 번째 이야기를 보냅니다. (아차차, 조금 늦었습니다.) 출판하면서 가장 기쁠 때는 좋은 책을 만났을 경우죠. 책이란 다 나름의 논리와 존재 이유가 있고, 사랑스러운 측면이 존재하겠죠. 아쉬운 부분도 있을 테고요. 그런데 내용이 너무 새롭고 신선해서 독자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인식 지평이 다 깨져나가고,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게 하는 그런 책은 흔치 않습니다.
그런 책을 만났습니다. 이번에 펴내는 『일본의 탄생: 미의 네트워크가 만든 독특한 문명』입니다. 여러분은 일본을 얼마나 아시나요?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다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는지요? 일본이란 게 알면 알수록 아리송해진다는 생각. 예전에 저는 일본에서 10년 넘게 유학 생활을 했던 학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이 그러더군요. 일본어나 일본 문화에 대해 어느 순간 거대한 벽이 생겨나더니 그 벽 바깥으로 자기가 밀려나는 것 같았다고. 본질적으로 그 사회 구성원의 내밀한 심리와 완벽하게 동화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거겠죠. 『일본의 탄생』은 바로 그런 부분을 심도 있게 건드리는 책입니다. 중세부터 근세까지 긴 역사적 시간을 대상으로, 정치한 사회 구조 분석을 통해 그 문명적 독특성이 무엇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 정확하게 보고자 한 시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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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탄생: 미의 네트워크가 만든 독특한 문명』
이케가미 에이코 지음 | 김영근·김영호·김유영·송완범·전성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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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름다움’이 매개가 되어 하나의 문명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에 ‘문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합당할까요? 지리적으로 보면 한자문화권의 가장 말단에서 그것을 다시 자기네들의 습성에 맞게 극단적으로 변형시킨 게 일본의 문자이고 체제라는 것은 인정되는 것이니까요. 불교도, 유교도, 인쇄술도, 도예술도 전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것은 일본 문명의 본질을 결정짓는 구성요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삶의 태도가 일본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과연 이게 무슨 말일까요? 그 주장의 근거들은 책에 자세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책이 주목하는 건 에도 시대입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교토에서 에도로 정치의 중심을 옮겨놓으면서 에도 시대가 개막하죠. 이때 정치의 변화와 경제의 부흥, 중세로부터 내려온 전통이 맞물리면서 일본 문명의 독특함이 개화합니다. 파동의 진원지에는 항상 무사 제도가 있습니다. 쇼군을 정점으로 하여 물샐틈없이 엄밀한 신분 체제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정립된 후 천황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쇼군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상한 건 완벽하게 무사가 정점이 된 사회를 구축했는데, 정작 무사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니) 할 일이 없어져버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반면, 시장과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상인들은 부유해지기 시작하죠. 이들이 문화의 중심에 나섭니다. 반면, 무사들은 가난합니다. 엄격한 규제도 많죠. 숨이 막히고 삶의 낙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상인들과 평민들이 노는 데 기웃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남들 즐겁게 노는 데 가서 무사 체면을 차릴 수 있나요? 무사 아닌 척, 슬쩍 그들 무리에 섞입니다. 벚꽃 아래에서 렌카도 짓고, 꽃꽂이도 하고, 다도와 음악 연주도 하면서 제2의 자아를 찾습니다. 평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체의 정치적인 주장을 할 수 없고, 무사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정규적인 삶에서는 신분 예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길만이 살아남는 길입니다. 반면, 여기를 벗어나 ‘모임’의 세계에 들어가면 어엿한 시인으로, 화가로, 연주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에도 시대의 이런저런 모임들은 가면무도회와 같습니다. 정규적 정체성을 내려놓고 예명으로, 필명으로, 제2의 자아로 만나서 그곳의 스승이 마련한 예법에 따르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이런 이중적 구조가 에도 시대에 오면 일본인의 보편적 삶의 형태로 자리를 잡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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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영대절용무진장大日本永代節用無尽蔵』의 삽화.
에도 초기 문화계는 사실 ‘신사 클럽’에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꽃꽂이 예술인 이케바나도 당시에는 여성이 아니라 남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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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 도감歌舞伎圖巻』의 삽화.
가부키 배우 우메네가 최신 의복을 차려입고 플레이보이를 연기 중입니다.
극장에는 남녀노소, 귀천도 따질 것 없이 관객들이 둘러앉아 있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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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의 실권자들은 모든 형태의 정치적 결사를 미리 차단했습니다. 다만, 취미 영역에서는 자유로운 모임을 허가합니다. 취미란 게 뭔가요. 바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유머와 해학, 경쟁의 요소들이 부가되고 출판 미디어가 붙으면서 자본주의가 작동합니다. 일종의 배출구로 허용한 ‘은신처’에 가까운 공간이 결국은 하나의 거대한 ‘시빌리티’(시민성)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100~200년의 시간 동안 서서히 말입니다. 결국 막부는 그 거대한 물결 앞에서 더 이상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메이지 유신이라는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 혁신적인 책에서 저자는 미학적 이미지가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복잡한 사회사의 단면을 밝혀냅니다. 조직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과 문화사에 대한 방대한 학식을 결합한 이 책은 공연 예술, 다도, 하이쿠를 매개로 이어진 미적 네트워크가 일본이라는 문명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담당한 핵심 역할부터 기모노 미학의 정치학, 상업 출판의 부흥, 예의범절의 대중화, 가부키 공연의 유행, 암묵적 소통 방식의 부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탐구합니다. 그 과정이 서양적 근대화의 보편 논리가 전혀 적용될 수 없는 특수한 근대화 과정의 한 사례를 입증하는 것이라 매우 흥미롭습니다.
몇 년 전 글항아리에서 펴낸 『일본의 굴레』가 현재 일본 정치사회의 모순을 밝혀내는 책이었다면, 이 책 『일본의 탄생』은 현재의 구조가 자라날 수 있었던 ‘토대’에 대한 해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두 책을 1부와 2부로 하여 일본을 이해한다면 아마 매우 성숙한 지일知日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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